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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67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18. 14:17

방랑시인 김삿갓 1-67 회

김삿갓의 질문을 받고 나자, 풍헌 영감은 별안간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아니... 우리 집 아이더러 대나무밭으로 찾아가서 현 진사댁 규수를 만나 보라고 일러주신 분은 삿갓 선생이 아니셨읍니까.」 

김삿갓은 그제서야 눈치를 채고,

「그렇게 일러준 것은 분명히 나였읍니다. 그러나 새벽부터 대나무밭으로 달려가서 무작정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 규수의 편지에는 만나자는 장소와 날짜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시간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면서요. 그래서 우리 집 아이는 새벽부터 그 대나무밭으로 달려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피차간에 시간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하면 큰일이니까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하, 아무리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로, 규중 처자(閨中處子)가 이목이 번다한 대낮에 나타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처녀 총각들이 밀회할 때에는 대개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는 시간을 선택하는 법이랍니다.」

풍헌 영감은 적이 불안스러워하면서,

「우리 집 아이가 어디 그런 것까지야 알겠읍니까. 시간이 어긋나 만나지 못하면 큰일이라 싶었던지, 새벽부터 간다고 서두르기에 나 역시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새벽같이 보내 버렸답니다.」 
「매사를 튼튼하게 하시느라고 그러셨군요.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본인들이 만나는 시간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라야 할 것입니다.」

문제의 처녀가 밀회의 날짜를 이십일 일로 정한 것은 달이 떠오르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선택한 것 같기에, 김삿갓은 자신을 가지고 예언하였다.

풍헌 영감은 연방 걱정스러운 빛을 보이며,

「언제 만나더라도 성혼만 되었으면 좋겠읍니다.」
「본인이 답장을 보내 올 정도였으니까, 이쪽에서 성의만 보이면 일은 순조롭게 풀려 나갈 것입니다.」
「성의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글쎄올시다. 그런 문제는 본인들이 만나 본 결과를 들어 보아서 새로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겠읍니까.」

김삿갓은 그 이상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아 적당히 휘갑을 쳐버렸다.
풍헌 영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읍니다. 그러면 우리 집 아이가 현 규수를 만나고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술이나 마시기로 하십시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돈 한푼 안 들이고 진종일 호화판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김삿갓의 예언대로 조 소년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풍헌 영감은 점점 초조해 하였다.

「우리 집 아이는 조반을 굶고 떠났는데다가, 점심도 못 먹었을 것이고.......」
「걱정마십시오. 이런 일로는 열흘을 굶어도 죽지 않는 법이오.」 

김삿갓은 술을 마셔 가며 한가롭게 익살만 부려 대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뜬 지 오래건만, 조 소년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풍헌 영감은 좌불안석이었다.

「삿갓 선생! 우리 집 아이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니 웬일입니까.」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으며 대답한다.

「처녀 총각이 어렵게 만났는데 쉽게 떨어질 것 같습니까. 자정안으로는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마십시오.」
「무사히 돌아와 주면 좋겠지만, 한밤중에 혼자 다니다가 밤짐승이라도 만나면...........」
「에이 여보시오. 호랑이한테 물려 갈까 봐 걱정이시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그 아이가 밤 짐승에게 물러갈 상(相)은 아닙니다.」

김삿갓은 안심시켜 주려고 허튼소리를 씨부러 대었다.
풍헌 영감은 <관상>이라는 말을 듣더니 크게 놀라며,

「삿갓 선생은 관상도 볼 줄 아셨던가요? ......그렇다면 한 말씀 묻겠는데, 우리 집 아이의 상이 어떠합니까.」

하고 나온다.

김삿갓은 관상을 볼 줄 아노라고 큰소리를 친 이상 뒤로 물러 설 수가 없게 되었다.

「관상이 나빴으면, 내가 그 애더러 그 처녀를 만나 보라고 했겠읍니까. 득남이는 앞으로 크게 성공할 상인데, 특히 처궁(妻宮)이 놀랄 만큼 좋았읍니다. 그러니까 이번 혼사는 만사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남을 칭찬해 주어서 손해볼 것이 없기에, 김삿갓은 무작정 치켜 올려 주었다.

「그래요?........... 우리 집 아이의 처궁이 그렇게도 좋습니까.」

풍헌 영감이 어쩔 줄을 모르도록 기뻐하는 바로 그때, 방문 밖에서 하인의 말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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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68 회

거짓 족보, 진짜 혼사

「도련님이 지금 돌아오시옵니다.」

뒤미처 소년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말한다.

「아버님, 지금 돌아왔사옵니다.」

그러다가 김삿갓이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넙죽하니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현 낭자를 기쁘게 만나고 돌아왔사옵니다. 모든 것이 선생님 덕분이었읍니다.」

김삿갓은 소년에게 묻는다.

「네가 몹시 기뻐하는 걸 보니, 모든 일이 뜻대로 된 모양이로구나. 그래, 가까이서 보아도 그 처자가 네 마음에 들더냐?」 
「선녀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읍니다.」
「하하하...... 달빛 속에 나타난 여자란 누가 보아도 선녀처럼 보이는 법이니라.」
「엣?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달이 떴을 때에 만난 것을 어떻게 아셨읍니까.」

풍헌 영감은 아들의 말을 듣고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 못하며 말한다.

「삿갓 선생께서는, 너희들이 달이 뜬 뒤에야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예언까지 하셨느니라. 그러고 보면 삿갓 선생이야말로 우리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보내 주신 사자이심이 분명하다.」

김삿갓은 일약 <하늘의 사자>가 되어 버린 셈이지만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풍헌 영감은 아들을 술상머리에 붙잡아 놓고, 미주알고주알 캐어 묻는다.

「그래, 그 처자가 그렇게도 네 마음에 들더냐? 얼굴이 선녀처럼 아름답더란 말이지?」

소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한다.

「먼빛으로는 여러 번 보아 왔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읍니다.」
「허어...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면 그게 바로 천생연분이 아니겠느냐. .........그래, 그 처자가 너한테 뭐라고 하더냐.」 

자기는 <籍>자 한 자만을 써보냈을 뿐인데, 글자 풀이를 누가 해주더냐고 물어 보았읍니다.」

그 소리를 듣자 풍헌 영감은 별안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그래, 뭐라고 대답했느냐. ...............설마 삿갓 선생이 글자 풀이를 해주셨다고는 말하지 않았겠지?」

소년은 엉큼스럽게 웃어 젖히면서,

「아버님두 참, 제가 미쳤다고 사실대로 말합니까. 답장을 받고 나서 사흘 동안이나 끙끙 앓으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사연을 알아냈노라고 대답했읍니다.」

김삿갓은 눈을 지그시 감고 건들건들 졸기만 하다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풍헌 영감은 안도의 가슴을 내리쓸며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