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9 회
「아쿠! 내가 자네한테 보기 좋게 한대 얻어 맞았네 그려.」
무안스러운 김에 얼굴을 돌려 보니, 저쪽에 앉아 있는 늙은이는 북어 껍질을 빨아 가며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주모는 그 늙은이에게는 일체 개의하지 않는다.
김병연은 얼른 화제를 돌려 이렇게 물었다.
「취옹정이라는 이름은 자네가 지은 이름은 아닐 것이고, 누가 그처럼 멋들어진 이름을 지어 주던가.」
주모는 저쪽에 앉아 있는 늙은이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그 이름이 그렇게도 좋은 이름인가요?」
「물론이지. 중국에 구양수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별호가 바로 취응이었거든. 그 사람이 지은 <취옹정기>라는 글에 <취홍정에서 술을 마시면 조금만 마셔도 이내 취한다>는 말이 나오네. 도대체 취옹정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 준 이름인가」
젊은 주모는 김병연의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는 빛을 보인다.
「취옹정이라는 말은 술을 조금만 마셔도 이내 취한다는 뜻이라구요? 그렇다면 이름을 당장 갈아 버리겠어요. ....... 어쩐지 장사가 신통치 않다 싶더니, 이제 알고 보니 이름이 나쁜 탓이었던 모양이죠? 이왕이면 손님이 좋은 이름을 하나 지어 주세요.」
그러자 쪽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늙은이가 넋두리라도 하듯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홍! 잡것 지랄하네!」
김병연은 그 소리에 문제의 늙은이를 곁눈으로 슬쩍 훔쳐보았다.
그러나 늙은이는 아무 말도 안 한 사람처럼 여전히 술만 마시고 있지 않는가.
(도대체 저 늙은이는 어떤 위인이기에 아까부터 저 모양일까. <잡것 지랄하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주모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아닐 것이고..............)
구태여 그쪽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에, 김병연은 주모에게 다시 묻는다.
「취옹정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은 학식이 매우 풍부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누군가?」
주모는 가벼운 코웃음을 쳐 보이며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한다.
「저기 앉아 있는 우리 아버지예요.」
그 소리에 김병연은 깜짝 놀랐다.
「뭐? 저기 앉아 계신 분이 자네 부친이라고?......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안하무인하게 주착을 떨었네그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병연은 아버지라는 말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술집 이름을 취옹정이라고 지은 사람이라면 학식이 풍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늙은이에게 앉은 채로 인사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노인장에게 인사 여쭙겠습니다. 저는 김병연이라고 합니다. 어르신네를 진짜 알아뵙지 못해 결례가 많았습니다.」
술이 만취한 늙은이는 몽롱한 시선으로 이후 잠시 멀거니 바라보다가
.
「옆에서 듣자니 자네는 상당히 유식한 젊은이네 그려. 취옹정이라는 이름을 보고 대뜸 구양수를 연상했다면, 학문이 이만저만 도저(到底)한 사람이 아니란 말야...........
오늘은 내가 좋은 친구를 만났으니, 우리 기분 좋게 한잔 나눌까.」
하고 말하더니 김병연에게 술잔을 내밀어 주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도 그를 모주망테인 줄만 알고 있었던 김병연은 새삼스러이 인식을 달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올시다. 제가 잔을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늙은이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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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0 회
「무슨 소리! 내 비록 과거에 열 번씩이나 실패는 했으되, 선비만은 제대로 알아 모시는 놈일세.」
과거에 열 번씩이나 낙방했다는 소리에 김병연은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의 늙은이가 술에 취해 어기적거리는 꼴은 아무리 보아도 모주망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열 번이나 실패했노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가.
과거에 열 번씩이나 실패했다는 말은, 과거를 열 번이나 보았다는 말과 똑같은 소리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떨어진 사실은 문제가 안 된다. 번번이 낙방을 하면서도 과거를 열 번씩이나 보았다면, 그 강인한 불퇴전(不退轉)의 정신에는 존경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병연은 술잔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붙고 못 붙는 것은 그때그때의 시운(時運) 이니까 별로 거론할 일이 못 되옵니다. 그러나 과거를 열 번씩이나 보셨다는 선생의 불굴 정신(不屈精神)에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옵니다.」
「예끼 이 사람! 과거에 떨어진 사람을 칭찬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러나저러나 내가 과거에 열 번이나 떨어진 것은 사실일세」
그러자 옆에 있던 주모가 코웃음을 가볍게 치면서 조그맣게 알려 준다.
「저 양반은 글을 배웠다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과거에 열 번 떨어진 것을 무슨 자랑삼아 떠드는 거예요.」
늙은이는 주모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중에 손을 휘저어 가면서,
「남들은 칠전팔기 (七顚八起)한다지만, 나는 십전 심도(十顚十倒)를 한 셈이야. 그러한 나를 존경한다구? 어림 없는 소리. 그런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시세」
「아니올시다. 치레의 말씀이 아니라, 과거를 열 번이나 보셨다는 그 끈덕진 정신력을 정말로 존경합니다」
「존경? 허허허. 아무래도 좋아.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거나 그것은 자네 자유야. 아뭏든 육십이 넘도록 과거에 매달렸다가 결국은 모양이 되었네. 이제 남은 인생은 오직 취생 몽사(醉生夢死)가 있을 뿐이야.」
늙은이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화제를 돌려 이렇게 묻는다.
「이왕 말이 났으니 말인데, 취생 몽사라는 말은 어느 책에 나오는 말인지 자네는 알고 있는가?」
「글쎄올시다. 저는 잘 모르웁니다. 취생몽사란 어느 책에 나오는 말입니까?」
그러자 늙은이는 회심의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 양양하게 말한다.
「그 말은 《정자어록(程子語錄)》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일세. 《정자어록》에
〈難高才明智나 膠于見聞하면 醉生夢死해도 不自覺也〉라는 말이 나오네.」
〈비록 재주가 놓고 지혜가 밝아도 보고 듣는 길이 막히면 일생을 헛되게 살아가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지. 결국은 나 같은 놈을 두고 한 말일세. 과거에 미쳐 돌아가는 동안에 가산을 탕진되고, 마누라는 죽고 죽고, 또 죽고, 결국은 우리 둘만이 남았을 뿐이거든.」
김병연은 늙은이의 말을 낙오자의 탄식으로 받아들일 밖에 없었다.
<낙오자의 단식>이라고 여겨지자, 김병연은 눈앞의 늙은이가 불현듯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과거라는 것은 국가에서 우수한 인재를 구하기 위한 수단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과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일생을 망치게 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젠 과거를 깨끗이 단념하셨습니까.」
「예끼 이 사람! 열 번이나 낙방을 했으면 그만이지, 또다시 낙방을 하란 말인가. 내 나이 이미 칠십, 나는 과거로 인해 일생을 망쳐 버린 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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