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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41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5. 15:45

방랑시인 김삿갓 1-41 회

1. 오늘부터는 김병연이라는 본명을 깨끗이 말살해 버리고, 오로지 <김삿갓>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할 것.
2. 어떤 경우에도 나의 신분을 말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운수걸객(雲水乞客)〉 으로 자처할 것
3. 일체의 물욕을 떨쳐 버리고 순수한 자연인으로 떠돌아 다닐것
4. 누구하고나 어떤 시비(是非)도 가리지 말 것.
5. 오는 정을 고맙게 받아들이되 정에 빠져 버리지 말 것이며, 가는 정을 붙잡지 말 것.
6. 어떤 수모를 당해도 웃음으로 받아넘길 것.
7. 언제나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 악과 교만이 맘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매사를 은연중에 바른 길로 유도해 나갈 것.

물론 권세가 없는 몸인지라, 언제 어디서 어떤 곤경에 빠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몸에 지니고 있는 돈이 떨어지면 그날부터는 거지 모양으로 밥도 얻어먹으며 다녀야 하게 되리라.

세상 인심이 좋다고는 하지만, 팔도강산의 모든 인심이 한결 '같다고는 볼 수 없는 일. 때로는 밥을 얻어먹으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가, 동냥을 거절당하는 경우도 노상 없지는 않으리라. 

때로는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야 할 경우도 없지 않으리라. 알거지로 돌아다니다가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벌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없다고도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김병연은 스스로 마음을 다져 먹었다.

가슴속에 쌓여 있던 세진(世塵)을 깨끗이 떨쳐 버리고 신선 같은 기분으로 고요한 산속을 걸어나가니, 마음이 그렇게도 상쾌할 수가 없었다.

〈무아(無我)의 세계는 바로 작자의 마음속에 있건만, 세상 사람들은 왜 부질없이 허깨비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아옹다움 싸우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자 역시 한 구절이 또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백년도 다 못 사는 주제에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生年不滿百 (생년불만백)
常懷千歲憂 (상회천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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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42 회

시인이 아니고서는 갈파할 수 없는 명구(名句)인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던 바로 그 산이요, 그물이었다.

그러나 비어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무심하게만 바라보아 오던 그 산과 그 물이 새삼스럽게 아름다와 보였다.

(아아, 산과 물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을, 지금까지는 어째서 모르고 살아왔던가)

취옹 노인이 나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산수간을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데 있다(醉翁之意不在酒,在乎山水之間也)라고 하던 말이 다시금 머리에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시 한 수가 또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물이 푸르러 산이 좋아하고 
산이 푸르러 물이 좋아라네 
시원스러운 산과 물 사이를 
한가한 나그네 홀로 걸어가네.

水綠山無厭 (수록산무염)
山靑水自親 (산청수자친)
浩然山水裡 (호연산수리)
來往一閑人 (래왕잏한인)

마치 누군가가 김병연 자신을 노래해 줄 것 같은 느낌조차 들었다.

여름 하늘은 한없이 넓고 맑다.
산중에는 오가는 사람조차 없어,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잘 들린다. 피를토하는 듯 극성스럽게 울어 쌓는 것은 꾀꼬리의 울음소리일 것이요. 

구구구하고 잠꼬대처럼 단조롭게 들려오는 것은 산비둘기의 울음소리이리라.
얼마를 걸어가다 보니, 높푸른 하늘가에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더니, 뭉게구름은 삽시간에 기묘한 산봉우리 형태로 변해 버린다.

김병연은 불현듯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연상하였다.

봄에는 물이 모든 못에 흘러 넘치고,
여름 구름은 기묘한 봉우리가 많기도 하다.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김병연은 삿갓을 눌러 쓰고 죽장 명혜(竹丈芒鞋)로 산천 경개를 유연히 둘러보며, 깊은 산속을 한가롭게 걸어나간다. 

애시 당초 날을 받아 놓고 가는 길도 아니요, 볼일이 있어 가는 길도 아니요. 꼭 가야 할 곳이 있어 떠난 길도 아니다. 

오늘 가다가 싫으면 내일 가도 그만이요, 동쪽으로 가다가 내키지 않으면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도 그만인 <無軌道)의 나그네길(旅路)이었다. 무궤도의 여로>란 모든 기반(羈絆)을 벗어난 자유 자재의 길이고 보니 마음은 마냥 한가롭기만 할 뿐이었다.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서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 하거든 잎에서 자고 가자

그 누가 읊은 시조였던가. 김병연은 옛날 사람들의 운치를 입속으로 불러 보며 한가롭게 걸어나갔다.

그러자 문득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이었던 선암(仙庵)유 창(劉敞)의 <유흥(幽興)>이라는 시가 머리에 떠오른다.
1
한가한 구름따라 숲속에 들어서니
솔바람 냇물소리 옷깃을 씻어 주네 
뜬 세상에 이 흥취 아는 사람 누가 있노
다만 저 산새만이 내 마음 알아주리.

步逐閒雲入翠林 (보축한운입졸림)
松風澗水洗塵襟 (송풍간수세진금)
悠悠浮世無知己 (유유부세무지기)
只有山禽解我心 (지유산금해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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