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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47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8. 14:24

방랑시인 김삿갓 1-47 회

주모의 말로 미루어 보면 외상 값이 어지간히 빌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백수건달은 주모의 거부 반응에는 끄덕도 아니하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며 또다시 호기를 부린다.

「아따, 외상이 몇 푼이나 된다고 야단이야. 내가 오늘 내일로 죽을 사람이 아닌데, 죽기 전에 외상을 못 받을까 봐 걱정인가...... 오늘은 큰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아무 걱정 말고 술이나 듬뿍 가져와요.」

술집 연연의 주모는 나이가 57, 8세 가량 되었을까, 김삿갓을 보더니 적이 놀라며,

「어서 오세요. 상제님이 같이 오셨는가보죠. 우리는 밑천이 딸려서 외상 술은 드리기가 어렵겠는데 어떡하죠?」

김삿갓을 상제로 잘못 알고 사정하듯 말한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 들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빙그레 웃었다. 

「오늘 먹는 술값은 내가 맞돈을 드리죠. 염려 말고 술이나 주시오」

백수 건달은 아랫목에 배짱 좋게 주저앉으며,

「오늘은 맞돈으로 준다는데 주모는 웬 잔소리가 그리도 많지?」 

하고 꾸중하듯 말한다.

그러나 주모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내가 술장사를 시작하던 첫날부터 삼 년 동안이나 외상 술을 먹어 온 주제에 무슨 낮짝으로 큰소리를 치는 거야.」
「아따, 외상 술을 주기가 그렇게도 아깝거든 숫제 나를 서방님으로 모시면 될 게 아닌가. 하하하... 안 그래요, 삿갓 양반!」 

백수 건달이 능글맞게 나올수록 주모는 약이 오르는지,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을 해보이며 뇌까린다.

「아이구, 이 술망나니야. 내가 서방에 게걸이 들었기로 백수 건달 따위를 미쳤다고 서방으로 삼을까.」

백수건달은 그럴수록 배짱 좋게 나온다.

「주모는 내 물건이 좋은 걸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구먼. 어떤 계집이든 내 물건을 한 번만 맛보면 보따리를 싸가지고 덤벼 들어 죽자 살자 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지, 그 물건만 먹고야 사는가. 개떡 같은 수작은 그만 하고 어서 외상이나 갚아요.」

백수건달이 워낙 신용을 잃었는지, 외상 값을 받기 전에는 술을 주지 않으려는 눈치다. 그러니까 김삿갓이 정면으로 나설 밖에 없었다.

「외상값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오늘 술값은 내가 낼 테니 염려 말고 술을 가져 오시오.」

주모는 그제서야 얼굴에 화색이 돌며,

「오늘 술값은 틀림없이 손님이 맞돈으로 주시는 거죠?」
하고 못을 박는다. 주모가 하도 미심쩍어하므로, 김삿삿은 숫제 호주머니에서 돈 자루를 꺼내 보였다.

「돈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걱정인가.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술이나 가져 오라구.」

돈자루를 보자 눈이 휘둥그래져 놀라는 사람은 주모만이 아니었다. 백수 건달도 왕방울 같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이봐요, 주모! 지금 저 돈자루를 보았지. 아까부터 내가 뭐라고 하던가. <큰손님>이라고 진작 말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마음놓고 술을 얼마든지 가져 오라구.」

주모는 그제서야 부엌으로 달려나가 주안상을 들고 들어오면서, 

「백수건달이 오늘에야 술을 마음껏 마시게 됐구먼. 그러나 남의 호주머니 돈을 내 돈으로 착각은 하지 말아요.」

하고 또 한마디 쏘아 잘긴다.

백수건달은 김삿갓에게 술을 따라 주며 또다시 주모를 나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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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48 회

「오늘은 큰손님이 허리띠를 풀어놓고 술을 취하도록 자실 작정인데, 무슨 놈의 술잔이 요렇게도 작아. 요런 술잔을 가지고서야 어디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장사를 제대로 하려거든 냉큼 부엌에 나가 왕사발을 가져 오라고」

「아따, 밤낮 외상술로 목이나 축이던 주제에, 오늘은 돈을 보더니 환장을 했는가보구먼. 남의 돈은 내 돈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제기랄, 돈이란 돌고 도는 것. 술자리에서 내 돈 남의 돈이 어디 있어............삿갓 양반, 안 그래요?」

김삿갓은 동의를 강요당하자, 너털웃음을 웃을밖에 없었다.

「암, 그렇구 말구......주모, 이왕이면 저 양반 말대로 왕사발을 가져 오시오」
비록 초면 인사이기는 하지만, 노상에서 술 친구를 만났다는 것은 진정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수 건달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술잔을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 가며 말한다.

「어허, 술맛 좋다. ...... 이렇듯 좋은 술을 한번도 마음껏 마셔 보지 못하고, 그놈의 외상값 때문에 주모한테 밤낮 구박을 받아 오고 있으니 신세가 따분해 못 살겠는걸.....삿갓 선생! 사내 대장부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료.」

김삿갓은 백수 건달에게 술을 다시 따라 주고, 자기도 잔을 비워 가면서 말한다.

「나도 술을 좋아하지만,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편이구료」
「물론이지요. 인생이란 술과 계집을 빼놓으면 뭐가 남겠소.」
「돈은 넉넉하니까 오늘은 마음껏 마셔 보시오.」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백수 건달은 감격해 마지 않으며,

「원, 이렇게도 고마울 수가 있나. 내가 어젯밤 돼지꿈을 꾸었더니 오늘은 술복이 한꺼번에 터졌읍니다그려.」

그리고 이번에는 주모를 건너다보며,

「이봐! 북어 꼬리처럼 말라 비틀어진 친구야! 지금 삿갓 선생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으렸다. 아까부터 내가 뭐라고 하던가. 이 손님으로 말하면 큰 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행여 돈 걱정은 말고 술을 더 가져 오라구.」

하고 사뭇 호기를 부린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취중에 터져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주모가 얼른 맞받아넘긴다.

「뭐? 나더러 말라 비틀어진 북어 꼬리 같다구? 먹지 못할 감이라고 장대로 찌르는 격이로구먼. 이래봬도 죽자살자 하고 덤비는 놈팡이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북어 꼬리한테도 죽자 살자 덤비는 놈팡이가 있는가. 그런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말로 미친놈이지. 물도 안 나오는 우물을 죽자구나 하고 들쑤셔서 어쩌자는 것이야. 하하하 안 그래요. 삿갓 선생!」

주고받는 입심이 하도 험상스러워, 자칫 잘못하다가는 육박전이라도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얼른 술잔을 높이 들며 휘갑을 치고 나왔다.

「이 좋은 술을 앞에 놓고 무슨 말이 그렇게들 많소」

그리고 백수 건달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노형한테는 한 가지 따져야 할 일이 있소이다.」
「에?....나한테 따질 일이 있다구요?」
「그렇소. 노형은 아까 나를 이 집에 데리고 올 때에, 이 집의 술안주는 천하 일품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정작 이 집에 와보니, 안주라고는 도토리묵 한 접시뿐이 아니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김삿갓이 안주 투정을 하자, 주모가 얼른 앞으로 나앉으며 대답을 가로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