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59 회
(망할 놈의 여편네, 나를 자기 아들이라고? 허허허.........허기는 자기 뱃속에서 나온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면 그 여편네도 보통내기는 아니야. 그러나 나도 그 여편네의 배를 탔던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촌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김삿갓은 생각수록 우스워서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연상 웃어대며 걸었다. 여자에게 그처럼 호되게 당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러나 <말 탄 양반>에게 농락을 당했을 때처럼 불쾌하지는 않았다.
지고 이기고가 문제가 아니라, 해괴망측한 농담을 멋지게 받아넘기는 그 여인의 마음의 여유가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인생의 멋이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얼마를 걷다 보니 다리가 아프다. 몸에 쌓여 있던 주독(酒毒)이 이제야 퍼져 나오는 모양이었다.
「말 좀 물어 봅시다. 이 부근에 객점 (客店)이나 객정 (客亭) 같은 것이 없을까요.」
김삿갓은 행인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객점>이란 술도 팔고 재워 주기도 하는 양수 겸장(兩手兼將)의 여사(旅舍)를 말하는 것이요, <객정>이란 사람을 재워 주기만 하는 단순한 여관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부근에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다오. 오가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죠.」
「그러면 양객(養客)하는 집이나, 절이나, 서당 같은 것도 없나요.」
김삿갓은 다시 물어 보았다.
지금 세상과는 달라, 그 시대에는 돈푼이나 있는 인심 좋은 부자는 자기 집 사랑방에서 오가는 나그네를 잠도 재워 주고, 밥도 대접해 보내는 일이 흔히 있었다. 그것을 <양객>이라고 일러 온다.
그리고 절이나 서당 같은 데서는 아무리 낯선 손님이 찾아와도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미풍 양속이 있었다.
김삿갓은 그런 풍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절이나 서당이 있는 곳을 물어 보았던 것이다.
행인은 그런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여기서 20리쯤 더 가면 <성미재 (成美齋)>라는 서당이 있소. 거기만 가면 편히 쉬어 갈 수 있을 것이니, 그리로 가보시오.」
하고 대답한다.
김삿갓은 지친 다리를 이끌고 20리를 더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성미재로 찾아오니, 낡아빠진 유관을 쓴 훈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댁은 어디서 오는 길손이오.」
「양주(楊州)에서 오는 사람입니다.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들렀읍니다.」
「양주? ...... 엊그제도 양주 손님이 하나 다녀갔는데 또 양주에서 왔다구?... 아뭏든 이리 들어오시오.」
다행히 쫓아 내지는 않을 모양이나, 매우 귀찮게 여기는 태도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서당에서는 10여 명의 학생들이 줄줄이 늘어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열이 하나같이 《천자문(千字文)》이나 《계몽선습(啓蒙先習)》을 읽는 조무래기들뿐이고, 고작 큰 아이라는 것이 겨우 《사략(史略)》 을 읽을 정도였다.
시골 훈장은 그와 같은 코흘리개를 상대로, 그래도 훈장이랍시고 아랫목에 도사리고 앉아 위엄을 떨고 있는 것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훈장은 수염을 연방 쓰다듬을 뿐만 아니라, 아랫목에 놓여 있는 놋요강에 주먹 같은 가래침을 탁탁 뱉아 가며 김삿갓에게 수작을 걸어온다.
「귀공은 양주에 사신다고 했는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
김삿갓은 귀찮은 대로 대답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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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60 회
「금강산 구경을 가는 길입니다.」
「허어... 금강산 구경을 가신다고?............... 금강산 구경을 간다는 걸 보니 댁은 가세가 매우 부유한 모양이구료.」
초면에 남의 집 가세를 물어 보는 것이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마침 그때 《사략》을 읽고 있던 고제자(高弟子)가 책을 들고 와서 손가락으로 글자 하나를 짚어 보이며 훈장에게 묻는다.
「선생님, 이게 무슨 글자입니까.」
김삿갓이 얼른 넘겨다 보니 동일 요(繞)라는 글자였다.
그러나 훈장은 암만 보아도 알 수가 없는지 별안간 눈을 비벼 대며,
「내가 돋보기가 없어서 글자가 보이지를 않는구나. 내일 돋보기를 가지고 와서 가르쳐 줄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하고 그냥 넘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모르는 글자는 눈이 어두운 탓으로 돌려 버리니, 훈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훈장은 그러고도 위엄을 떠느라고 김삿갓에게 다시 묻는다.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법이오. 귀공은 책을 어느 정도로 읽으셨소.」
김삿갓은 약간 아니꼬운 생각이 들어 얼른 이렇게 대답하였다.
「책을 많이는 못 읽고 겨우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읽었을 뿐입니다.」
훈장은 《사서삼경》이라는 소리에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기색을 보인다.
「《사서삼경》? ............《사서삼경》까지 읽었다면 학문이 매우 독실 하신 편이 아니오.」
마침 그때 문밖에서 큰 기침 소리가 나더니, 60세 가량 되어 보이는 늙은이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서며,
「학장 선생, 안녕하시오.」
하고 말한다.
의관을 정제하고, 손에는 장족(長竹)까지 들고 있는 품이 제법 세도가인 성싶었다. 훈장은 손님을 보자 허겁지겁 일어서더니 두 손을 비비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풍헌 영감님께서 왕립해 주셔서 이런 영광이 없사옵니다.......어여 아랫목에 앉으시옵소서.」
하고 대뜸 아랫목으로 모시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풍헌>이라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실소(失笑)하였다. 풍헌이란 대단치 않은 늙은이이기 때문이었다.
초학 훈장(初學訓長)이 아무리 초라한 존재이기로, 선비로서의 체통만은 제대로 지켜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개 촌로에 불과한 풍헌 영감에게 채신머리없이 아첨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시골서 훈장 노릇을 해먹으려면 저렇게 비굴해야만 하는 것일까.)
풍헌 영감은 아랫목에 도도하게 도사리고 앉더니 김삿갓을 힐 끗 쳐다보며,
「어디서 손님이 오셨나 보구료.」
하고 훈장에게 묻는다.
훈장은 약간 당황하는 빛을 보이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참, 이 어른한테 인사 여쭈시오. 이 어른으로 말씀하면, 우리 서당의 당주 어른이시오. ............ 이 사람은 금강산으로 가는 과객 이온데,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는 매우 박식한 선비인가봅니다.」
풍헌 영감은 소개의 말을 듣고 매우 감탄하는 빛을 보인다
「허어............ 금강산 구경을 가는 과객인데 《사서삼경》까지 읽으셨다고? 그렇다면 학장 선생은 이 깊은 산중에서 좋은 글 친구를 만난 셈이구료? 하하하.」
「이를테면 그런 셈입니다. ............풍헌 어른께서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오늘은 제가 술을 한잔 대접하기로 하겠읍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이 글을 읽고 있는 서당방 아랫목에서는 난데 없는 향연이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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