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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3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3. 21. 15:50

방랑시인 김삿갓 1-13 회

주모는 급히 쫓아오느라고 숨을 헐떡거리며

「돈을 받으려고 달려온 게 아니라, 술값을 두 냥이나 두고 가셔서 한 냥은 돌려 드리려고 달려온 거예요.」

하고 말하며 한 냥을 내밀었다.

김병연은 그 말에 활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술장수가 그렇게도 정직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매상고를 올리기 위해 술을 억지로 마시노라고 말한 것은 순전히 농담에 지나지 않았더란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병연은 더욱 감격스러워 얼른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일단 내놓은 술값을 되돌려 받는 숙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 소리 말고 그냥 받아 두게」

그러나 주모 윤보패는 도리질을 하면서.

「그건 안 돼요 아무리 술장사를 해 먹어도 경우에 벗어나는 돈을 어떻게 받아요. 이 돈을 받아 넣으세요.」
「아따! 자네는 고집이 대단하네그려. 기어이 들려주고 싶거든 나중에 술값으로 때우면 될 게 아닌가.」

그러자 주모는 별안간 얼굴에 기쁨이 그득해지면서,

「아 참, 그러네요........... 그러면 이 돈은 내가 말아 둘 테니, 잊지 말고 언제든지 꼭 오세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서 가보게.」

김병연은 주모와 작별하고 돌아서면서도, 그녀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인정에 눈시울이 뜨거워 올 지경이었다.

김병현은 동현 안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문득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취옹정의 젊은 주모가 집으로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빤히 보인다.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

김병연은 점점 멀어져 가는 주모의 뒷모습을 그윽히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비록 술장사는 해먹을 망정 까닭 없는 돈은 못 받겠노라고 고집을 부리던 그 순정, 그 돈을 되돌려 받지 않으려거든 자기가 곱게 간직해 둘 테니 언제든지 잊지 말고 다시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던 그 따뜻한 인정. 

그처럼 순수한 온정이야말로 수천 년을 두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인심이 아니었던가.

취옹정 늙은이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70 이 다 된 의붓 아버지를 남편으로 모시며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 부부간의 금실이 어떠한지를 김병연은 물론 모른다. 그러나 마음씨가 그렇게도 고운 여인이라면 어떠한 불평 불만도 슬기롭게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위 양반이라고 으스대는 서울의 벼슬아치들은 노론(老論)이니 소론(小論)이니, 남인(南人)이니 북인(北人)이니 해가면서 서로 간에 잡아먹지 못해 안달들이건만, 삼천리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무명 서민들은 서로서로 남을 도와 주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그 얼마나 마음 흐뭇한 아름다움인가 싶었다.

젊은 주모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자, 김병연은 그제서야 동헌 안마당으로 들어와 방문(榜文)을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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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4 회


숨겨진 집안 내력

동헌 바람벽에는 백일장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단이 열기 명식(列記名式)으로 좍 나붙어 있었다.

그러나 김병연의 이름만은 특별히 큰 글씨로,

<壯元及第金炳淵>

이라고 별도로 나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김병연은 방문을 보고 새삼스러이 기뻤다.

(아아, 장원 급제가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어머니께 효도를 하게 된 셈이로구나!)

장원 급제라는 그 일 자체보다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우리들 삼형제(金炳淵은 兄 炳夏와 아우 炳湖와 三兄弟였다)를 혼자 길러 내시느라고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해오신 우리 어머니.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 삼 년이 멀다하게 이 지방 저 지방으로 집을 옮겨 다니신 우리 어머니. 밥을 굶어 가면서도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질을 해가며 글공부를 독려해 주시던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백일장에 장원 급제한 것을 아시면 얼 마나 기뻐하실까.》

그 일을 생각하자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빨리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기쁨을 알려 드려야지.) 

해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건만, 김병연은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을 부지런히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새벽녘에 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어머니는 발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방문을 탕 열어 제치며,

「병연이냐?」

하고 큰소리로 묻는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읍니다. ......어머니, 아직도 안 주무셨읍니까.」

김병연이 툇마루에 올라서자 어머니는 달려 나오며,

「어서 오너라. 네가 백일장을 보러 갔는데 에미가 어떻게 잠이 오겠느냐. 네 처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제야 깨닫고 보니, 아내 황씨 (黃氏)는 젖먹이 어린것을 안고 남편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백일장의 결과가 어떻게 되셨어요?」

하고 초조하게 묻는다.

어머니와 아내는 백일장의 결과가 그렇게도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김병연은 큰절을 올리려고 손을 모아 잡고 웃으면서 말한다. 

「어머니! 절 받으십시오. 오늘은 어머니께 큰절을 올려야 하겠읍니다.」

어머니 이씨는 재빠르게 눈치를 알아채고 어쩔 줄을 모르도록 기뻐하면서,

「느닷없이 큰 절이 웬 말이냐...... 아니 그럼, 네가 백일장에 장원 급제를 한 모양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제가 오늘은 어머니의 소원대로 장원 급제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 큰절을 올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소리를 듣자 어머니는 아들의 등을 왈칵 부둥켜 안으며, 

「아이구 내 아들아! 네가 기어코 장원을 해내고야 말았구나. 세상에 이런 기쁨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잖아도 이 에미는 내 아들이 장원을 하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장원 급제를 네가 못하면 누가 하겠느냐.」

하고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