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1 회
그때 마침 밖에서 누군가가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젊은 주모는 얼른 일어서 밖으로 나가면서,
「우리 집 영감님은 글 타령을 무척 좋아하세요. 손님이 좀 상대를 해드리세요.」
하고 말한다.
아까는 분명히 <아버지>라고 말했는데, 이제 와서는 <우리 집 영감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쩐지 수상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늙은이는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밖에 나간 그 애는 낮에는 나의 딸이요, 밤에는 나의 마누라일세.」
김병연은 그 말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이면 딸이고 마누라면 마누라지, 낮에는 딸이고 밤에는 마누라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선생은 딸과 마누라를 혼동하실 정도로 너무 취하셨나 봅니다. 이제 술은 그만 드시고 한잠 주무십시오.」
슬쩍 그렇게 건드려 보니 늙은이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 사람아, 취하기는 누가 취해! 지금 그 애가 낮에는 딸이고, 밤에는 마누라인 것만은 사실일세..」
하고 일부러 강조하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두 원! 상피(相避)를 붙기 전에는 세상에 그런 촌수(寸數)가 어디 있습니까.」
「있지! 있구말구. 지금 그 애와 나의 사이가 바로 그런 관계 인걸.」
「저는 선생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읍니다. 상피를 붙기 전에는 어떻게 그런 관계가 성립됩니까」
그러자 늙은이는 주정삼아 중언 부언 설명을 늘어놓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본명을 변응수(邊應洙)라고 부르는 그 늙은이는 어렸을 때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가는 것이 일생의 소망이었다. 그리하여 자나깨나 글만 열심히 들이파고 있었는데,
그동안에 마누라가 세 명이나 죽고, 네번째로 들어온 마누라가 주모의 어머니였다. 네번째의 마누라는 윤보패 (尹寶貝)라고 하는 의붓딸 자식을 하나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 애가 바로 오늘의 주모였었다.
그런데 네번째의 마누라가 7년 전에 또 죽게 될 때 그녀는 영감에게,
「내가 죽거든 영감님은 다른 여자를 데려올 생각 말고, 숫제 보패를 마누라로 데리고 살아 주세요.」
하는 유언을 남겨 놓아서, 지금은 밤이면 보패와 부부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늙은이의 말을 들어 보면 족히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하였다. 후취 마누라가 데리고 들어온 딸이라면, 영감과는 피가 통하지 않은 것만은 확신한 일이다. 그렇다면 상피를 붙었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후취 마누라가 임종에 즈음하여 <내가 죽거든 영감님은 보패를 마누라로 데리고 살아 주세요>하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도, 도덕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왜냐하면, 의붓자식도 자식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누라가 상식에 벗어난 유언을 했다면, 그것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아니 어린 딸의 일생을 맡겨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남편을 존경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부인이 그런 유언을 남기신 것을 보면, 그분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딸자식까지 맡기고 싶도록 선생을 존경했던 모양이죠?」
늙은이는 그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아닌게 아니라, 내가 벼슬 복은 없어도 마누라 복만은 과분하게 타고난 놈이야. 마누라가 넷이나 죽었지만, 네 마누라가 한결같이 나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정도의 현처(賢妻)들이었거든. 지금 그 애만 해도 그렇지. 새파랗게 젊은것이 나 같은 늙은이가 뭐가 좋겠어. 그러나 그 애도 그게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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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2 회
늙은이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 다시 말을 계속 한다
「말이야 바른대로 말이지, 칠십이 다 된 늙은이가 무슨 서방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 애는 아무 불평없이 나를 극진히 아껴 준단 말야!」
김병연은 이 늙은이가 무엇 때문에 잠자리의 이야기까지 나한테 들려줄까 싶었다. 그러자 문득,
(옳아! 이 늙은이는 나를 경계하느라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노후에 좋은 마누라를 무셔서 무척 행복스러우시겠읍니다.」
늙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좋은 아이야. .........그러나 늙으면 마누라보다도 더 좋은 것은 역시 술이거든.........내가 이태백의 시를 한 수 읊을 테니 자네 들어보게!」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나간다.
술 취하면 세상 만사를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외로운 꿈에 잠기네
내 몸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
醉後失天地 (취후실천지)
ㄫ然就孤枕 (올연취고침)
不知有吾身 (부지유오신)
̇此樂爲最甚 (차락위최심)
자기 딴에는 흥에 겨워 시를 읊어 내고 있었지만, 이편에서 보기에는 눈물겹도록 처량해 보이기만 하였다.
(인생이란 늙으면 저렇게도 처량하게 되는 것일까.)
잠시 수연(愁然)한 애수에 잠겨 있노라니까 문득 문밖에서,
「남은 장원 급제를 하는데 우리들은 모두가 낙방을 했으니 홧김에 술이나 마시세.」
하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 오지 않는가.
김병연은 문밖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장원이니 낙방이니 하고 떠드는 것을 보면 어느새 백일장의 결과가 발표되었단 말인가.)
김병연은 방문을 <탕!> 열어 제치고 바깥을 내다보며 묻는다.
「여보세요, 백일장의 결과가 벌써 발표되었읍니까.」
「지금 막 발표되었다우. 우리들은 모두가 낙방되어서 홧김에 술이나 마시러 오는 길이오.」
「어떤 사람이 장원 급제가 되었읍니까」
「머, 김병연이라고 하던가요..... 전연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장원을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오.」
「장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이 김병연이라구요?」
김병연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느 정도의 자신은 있었지만, 정말로 장원 급제가 되었다고 하니 크게 기뻤던 것이다.
술값을 치르려고 했으나 주모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김병연은 엽전 두 냥을 주인 늙은이에게 내맡기고 부랴부랴 동헌으로 달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동헌 안마당으로 막 들어서려고 하는데,
「여보세요, 서울 손님! 나 좀 보세요.」
하고 숨 가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돌아다보니 취옹정의 주모였다.
「술값은 영감님한테 넉넉히 드렸는데 왜 쫓아오는가. 무전 취식(無錢取食)을 하고 도망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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