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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5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3. 23. 14:05

방랑시인 김삿갓 1-15 회

그나 그뿐인가. 옆에 있던 아내도 기쁨을 감추지 못해 벙글벙글 웃으며 조그맣게 소곤거린다.

「당신은 정말로 장하세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장원을 하셨으니 얼마나 영광이에요.」

김병연은 백일장에 장원 급제한 것이 어머니와 아내를 그렇게도 기쁘게 해줄 줄은 몰랐다.

「어머니! 그만 기뻐하시고 큰절부터 받으십시오.」
「오냐!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은 네 절을 받아야 하겠다.」 

어머니는 큰절을 받고 나더니, 별안간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며 혼잣말로 탄식하듯 중얼거린다.

「너의 아버님이 생존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 소리에 김병연은 가슴이 뭉클해 왔다.

「어머니! 저 역시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오냐! 네 말이 옳은 말이다. 오늘같이 기쁜 날에 눈물을 보인 이 에미가 어리석었다.」

어머니 이씨는 치마 고름으로 눈물을 닦고 나더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이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미 백일장에 장원 급제를 했으니, 이 에미는 너에게 새로운 부탁이 하나 있다.」

김병연은 머리를 정중히 수그려 보이며 반문한다.

「어머니!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을 하십시오.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제가 거역할 리가 있겠습니까」
「고마운 말이다.」

어머니는 감격의 눈물을 씹어 삼키느라고 입술을 깨물고 말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 고정하시고 어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오냐 이 에미가 네게 바라는 것은, 네가 벼슬길에 오르는 일이로다. 벼슬길로 나가려면 과거를 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너는 오늘부터 과거 준비를 착실하게 해 가지고, 올 가을에는 서울에 올라가 과거를 보도록 하거라. 네 실력이면 과거에 어렵지 않게 급제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가 과거를 보라는 말씀입니까..」

김병연은 평소부터 벼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약간 실망 하는 어조로 반문하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심드렁한 태도가 매우 못마땅한 듯, 새삼스러이 정색을 하며 말한다.

「내가 아직 철이 없어 그러지.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가면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하는 길밖에 없느니라. 사또가 되고 판서 (判書)가 되어 세상을 호령하며 살아가려면, 우선 과거에 급제를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김병연은 어머니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벼슬길로 나가려면 과거를 거쳐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나가는 길>이라는 생각에는 이론이 없을 수 없었다. 

이태백 같은 사람은 한평생 시만 읊어 오면서도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서 천하가 우러러보는 인물이 되지 않았던가.

그나 그뿐이랴. 도연명(陶淵明) 같은 사람은 벼슬을 하면서도 마음에 마땅치 않아. 결국은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한 편의 시를 남겨 놓고 벼슬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나 버리지 않았던가.

김병연의 소망은 고관 대작(高官大爵)을 타고 앉아 일생을 떵떵 거리며 살아가는 데 있지 않았다. 이태백이나 도연명처럼 시인으로서 일생을 자유 분방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그와 같은 심정을 이해해 줄 리가 없었다.

「어머니! 과거를 보아서 꼭 벼슬을 해야만 합니까.」
「물론이지.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벼슬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어머니는 재론의 필요조차 없는 듯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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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6 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김병연은, 지난날 밤에 어머니가 무심중에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켜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던 말이 불현듯 연상되었다.

김병연은 <가문을 다시 일으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벼슬길로 나가 주기를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은 <가문을 다시 일으켜 달라>는 말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김병연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벼슬길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우리 가문에서 지난날에 누군가가 고관 대작을 지내다가 몰락한 일이 있다면, 우리 집을 다시 일으켜 놓아야 할 것은 후손 된 나의 의무 가 아니겠는가.)

어머니가 어떤 이유로 가문을 다시 일으켜 놓으라고 강조하시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빛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김병연은 문득 얼굴을 들며 힘있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그렇게도 소원이시라면 과거를 보도록 하겠읍니다. 주제넘은 소리 같습니다마는 과거를 보면 급제할 자신은 있읍니다.」

어머니 이씨는 그 말에 춤이라도 출 듯 기뻐하며,

「오오, 고마운 말이로다. 네가 만약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먼 훗날에 판서 대감이라도 되어 준다면, 지하에 계신 조상님들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도 <판서 대감>이라는 소리에 기쁨을 금치 못하며,

「당신이 판서 대감이 되신다면, 저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노릇을 해야겠네요.」

하고 농담까지 늘어놓는다.

김병연은 벼슬길로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자, 눈앞에 광명의 세계가 환하게 전개되어 오는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궁금한 것이 가문의 역사였다.

(우리 가문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나에게 벼슬길로 나가 주기를 그렇게도 간청하실까. 그러면서도 가문의 역사를 시원스럽게 말해 주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 일을 정면으로 물어 보아서는 시원스럽게 말해 줄 것 같지 않아, 김병연은 엉뚱한 말을 끄집어내었다.

「어머니! 저는 시험을 보면 남달리 운수(運數)가 좋은 놈인 것 같습니다.」
「운수가 좋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운수가 아무리 좋아도 나 같은 무식장이가 백일장에 장원이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야 물론 그렇겠죠. 그러나 저는 이번에 백일장을 보면서, 시험에는 운수가 반드시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생소한 역사 문제가 시제(試題)로 나오면 충실한 답안을 쓸 수가 없을 것이 아니겠읍니까. 그런데 이번 백일장에서는 제가 잘 알고 있는 문제가 나왔으니, 그게 바로 운수가 좋았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새삼 기뻐하며 반문한다.

「그거 참 운수가 좋았구나. 어떤 문제가 나왔기에 그러느냐.」 
「지금부터 16,7년 전에 우리나라에 <홍경래 난 (洪景來亂)>이라는 굉장한 반란 사건이 있었던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십니까?」 

김병연은 무심코 물어 본 말이었다.

그러나 홍경래라는 말이 나오자, 어머니 이씨의 얼굴에는 별안간 경악의 빛이 농후해졌다.

이씨 부인은 홍경래라는 말만 들어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아오던 자기네 가문이 일조일석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난 것은 홍경래 난 때문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