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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7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3. 23. 14:38

방랑시인 김삿갓 1-17 회

선천 방어사(宣川防禦使)로 이름을 날려 오던 시아버님 김익순(金益淳)이 역적으로 몰려 참살을 당한 것도 홍경래 난 때문이었고, 남편 김안근(金安根)이 젊은 나이에 울화병으로 조사(早死)한 것도 홍경래 난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일들은 가문의 치욕이 아닐 수 없기에, 이씨 부인은 그러한 과거를 아이들에게만은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 왔었다. 

그런데 아들 병연이가 느닷없이 홍경래의 말을 끄집어내고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이씨 부인은 아들에게 놀란 빛을 보이지 않으려고 짐짓 태연한 안색을 꾸미며 묻는다.

「너는 운수 좋았던 얘기를 하다 말고 별안간 홍경래 얘기는 왜 집어내느냐.」

어머니의 눈치를 미처 깨닫지 못한 아들은 예사롭게 이렇게 대답한다.

「어머니, 그런 게 아닙니다. 백일장의 시제로 나온 문제가 바로 홍경래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뭐야? 백일장의 시제가 홍경래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역사에 흥미가 있어서 홍경래 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았는데, 바로 그 문제가 백일장의 시제로 나왔으니 그야말로 운수가 좋았던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말을 듣는 이씨 부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래서 너는 백일장의 내용을 어떻게 썼느냐. 좀더 자세하게 말해 보아라.」
「자세하게 말씀드리죠. 시제의 내용은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였는데, 그것을 쉬운 말로 풀이하면 <가산 군수 정 시가 용감하게 전사한 충성심을 높이 받들고, 홍경래에게 항복한 선천 방어사 김익순의 죄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라>는 뜻이었읍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평소부터 일가견(一家見)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는 명답안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김병언은 신바람이 나게 떠들어내었다.

이씨 부인은 정신없이 반문한다.
「무엇을 어떻게 필기에 그러느냐?」
「반군에게 비열하게 항복한 천 방어사 김익순이라는 자를 통렬하게 규탄했다는 말입니다.」
「네가 김익순을?」
「그렇습니다. 방어사라는 중책을 맡은 자가 반란군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으니, 그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립니까. 저는 평소에도 그 자를 몹시 경멸해 왔었기 때문에 옳다! 잘 만났다 싶어 뼈도 못 추릴 만큼 신랄하게 두들겨 패 버렸습니다.」

이씨 부인은 아들의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 왔다. 김익순은 다른 사람 아닌 김병연의 할아버지가 아니었던가. 병언은 그런 관계를 전연 모르고 자기 할아버지를 <통렬하게 규탄>했노라고 자랑삼아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한 <김익순은 다른 사람 아닌 너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진작 알려 주었더라면 오늘날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씨 부인은 조상의 불명예를 자식들에게만은 알려 주고 싶지 않아. 끝내 비밀에 붙어 오다가 결국은 이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씨 부인은 가슴이 메어져 오는 뉘우침과 비애를 동시에 느끼며 아들에게 정신없이 묻는다.

「네가 선천 방어사의 얘기를 어떤 말로 규탄했는지 이 에미가 한번 들어 보고 싶구나.」

그렇게 말하는 이씨 부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괴어 있었다. 그러나 김병연은 그런 줄도 모르고 신바람이 나서,

「제가 명시(名詩)를 써서 장원 급제가 되었으니까 어머니도 한번 들어 보아 주십시오.」

하고 허공을 바라보며 자기 시를 한구절 한구절 낭랑하게 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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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8 회

신하로 불려 오던 너 김익순은 듣거라
좋은 문관이면서도 충성을 다해 싸우지 않았더냐 
너는 적에게 항복한 한나라의 이 릉과 같은 놈이요 
정 시의 공명은 송나라의 악비처럼 길이 빛나리보다.

시인은 이런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기에
칼을 어루만지며 물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자고로 대장이 지켜 오는 큰 고을이기에 
가산보다도 의를 앞서 가며 지켜야 할 곳이 아니었더냐.
.................
.................

서북으로부터 개탄할 소식이 들려오기에
어느 가문에서 나온 벼슬아치냐고 물어 보았더니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 김씨요
항렬은 장안에서도 소문난 순자 돌림이 아니더냐.

김병연이 기억을 더듬어 가며 여기까지 읊어 내려 왔을 때 이 씨 부인의 몸은 사시나무같이 떨렸고,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병연은 정신없이 시를 외어 나간다.

임금님 앞에 꿇어 엎드리던 바로 그 무릎으로 
서북 흉적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으니
너는 죽어서 황천에도 못 갈 놈이라................

시 낭송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그만!」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이씨 부인은 방바닥에 쭉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김병현 내외는 기급을 하게 놀라며 어머니 곁으로 달려왔다.
「어머니! 왜 이러십니까?」

그러나 이씨 부인은 기절을 한 채 대답이 없다.

「어머니!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십시오.」

그래도 이씨 부인은 인사 불성이었다.

「이봐! 실신하신 모양이니 빨리 물을 떠와요.」

아들 내외는 어머니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인중(人中)을 계속 비벼 대었다.
그 모양으로 한참 동안 법석을 떨다 보니 이씨 부인은 그제서야 한숨을 쉬며 눈을 떠 보인다.

「어머니! 별안간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디가 아프셔서 그러십니까.」

이씨 부인은 가까스로 자기 정신으로 돌아온 듯 눈을 힘겹게 뜨더니, 아들의 얼굴만 뻔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제가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었읍니까」
「...........」

아무 대답도 안 하고 아들의 얼굴만 올려다보는 이씨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처럼 노여워하시는지, 자세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그래야만 노여움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이씨 부인은 땅이 꺼질 듯한 긴 한숨을 쉬고 나서.

「우리 집안이 이렇게까지 몰락될 줄은 몰랐구나. 너나 나나 모두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로다.」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러십니까.」

김병연은 어머니의 팔을 안타까이 잡아 흔들며 캐어 물었다. 그러나 이씨 부인은 다시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이 없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눈을 다시 뜨더니 분명한 어조로, 

「나를 좀 일어나 앉게 해다오.」

하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