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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김자점의 손자, 김자점은 능지처참의 효시•

이종육[소 운(素 雲)] 2024. 3. 6. 16:11

•김구는 김자점의 손자, 김자점은 능지처참의 효시•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고, 왕을 제치고 독재를 했다.
효종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자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해 능지처참을 당했다.
김자점이 능지처참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의 손자 김구 역시 김일성이 가장 아끼던 간첩 성시백에 포섭돼 북으로 밀행하여 1948년 4월 22일 김일성 정부 수립 행사에서 남쪽은
거지이고, 북쪽은 풍요로운 곳이라며 김일성을 위한 찬조 연설을 했고, 이후 이승만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건국 후에도 건국을 부정하다가 안두희 총을 맞았다.

김창수, 김구의 본명이다. 김창수 역시 ‘국가를 배신하고, 적장에 충성했던 김자점’처럼
똑같이 반역했다. 김자점은 능지처참 당했지만 김구는 애국 청년 장교 안두희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백범일지는 왜곡된 설화

많은 사람들이 백범일지를 읽고 속는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 작이다.
이광수의 글재주는 생쥐를 ‘백두산 호랑이’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백범일지의 대표적 거짓말은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에 대한 것이다. 백범일지에는 ‘쓰치다 조스케’ 일본군 중위가 국모 민비를  살해했기 때문에 김구가 애국심이 동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 거짓말이다. ‘쓰치다 조스케’는 일본인 젊은 행상이었다. 이 상인이 황해도
치악포라는 포구에 짐과 돈을 실은 배를 정박시켜 놓고 주막 집에서 자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김구가 끌어내 돌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배에 있는 돈을 갈취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창수는
해주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인천 감리서로 이송되었고 간신히 사형 선고를 면한 다음 수감돼 있다가 1898년 3월 19일 탈옥했다.

백범일지는 임금님이 인천에 전화를 걸어 그를 사면시켰다고 기재돼 있지만 이 모두 거짓말이다.
이에 대한 증명을 필자가 2019년 발행한 <조선과 일본> 제62~64쪽에 전개돼 있다.

김창수(김구)는 왜 황해도로 갔나?

3족을 멸망당한 김자점 가문, 그 손자 김창수(김구)는 어떻게 한양에서 황해도로 갔는가.
강보에 쌓인 김창수를 누군가가 황해도로 안고 갔기 때문이다. 김구는 곰보여서 동네 아이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고 놀림당하면 심지어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나가 아이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놀림을 많이 받았으니 열등의식도 자랐을 수 있을 것이고 기질이 공격적, 폭력적으로 가꾸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이승만에 사사건건 발을 건 과정을 보면 그의 이런 기질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승만에 대한 극도의 질투심으로 김일성을 도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사파가 위조한 영웅 김구, 우파가 왜 빠나?

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제3의 기재에 의하면 이승만은 소련으로 날아가는 조선이라는 풍선을
기적적으로 중간에서 가로챘다. 미국 행정부 핵심에 침투한 소련 간첩 히스에 놀아난 루스벨트의
결심을 드라마틱하게 돌려놓은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반면 이승만을 짓밟는 5.18과 민주당 패거리들은 이런 ‘이승만을 쓰러뜨려서 위에서 깔고 앉기를
일삼는 김구’를 사실상의 건국 대통령으로 선전해왔다. 이번 8.15 행사 플랫폼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였다. 대통령이 김구와 이종찬을 8.15 행사에 주역으로 선정한 것은 솔직히 창피한 선택이었다.

김구의 주특기는 살인

김구의 주특기는 주먹과 폭력과 살인과 살인교사다. 폭력으로 빼앗긴 조선이 찾아진다면 애초에
빼앗기질 않았어야 했다. 이러한 살인마를 대한민국의 영웅이라 하고 김일성에 놀아나 김일성의
건국(?)을 도운 반역자를 건국자라고 칭송하면? 일본에서 어린애들을 안고 남편이 돈 벌어갖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던 ‘쓰치다 조스케’ 부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

필자의 눈에는 김창수는 장래가 구만리 같은 의협심 있는 두 젊은이들(윤봉길, 이봉창)에게 살인을
교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미국의 정계를 움직이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겨우 김구가 한
일은 일본인 행상을 돌로 때려 살해하여 돈을 훔치고 살인 교사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김구를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구의 아들을 중용하면서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념전쟁! 하려면 철저히 성역 없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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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이승만 죽이기'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된 이유였다.

그렇게 해마다 6.25 한국전쟁 때가 되면 방송에선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친 런승만'이란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27일 서울중앙방송으로 발표된 이승만의 담화문 어디에도 시민들에게 서울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전사 어디에도 800명이나 되는 양민들이 한강 다리 폭파로 사망했다는 자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근거도 없는 거짓말들이다.
(실제로는 다리밑에 부표를 설치해서 시민들은 부표위로 한강을 건너게된 역사자료들이 영화속에 상세히 나온다.)

'미제의 앞잡이, 친일파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라는 논리 역시 단골로 등장하는 이승만 비판이다.

그것은 이승만을 죽이고 김구를 띄워야 했던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인영은 '우리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다'라면서 국회에 나와 증언했다.

평생 '이승만 죽이기'에 앞장선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의 거짓말에 있다.
대표적인 친북 주사파 운동권이었던 그는 '주사파는 없다'라고 증언했다. 정말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이인영 같은 친북 주사파가 한 나라의 통일부 장관을 하고, '주사파는 없다'면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나라, 그것이 불과 3,4년 전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영화 '건국전쟁'의 제작 과정은 그런 근거 없는 거짓말과의 싸움이었다.

그걸 밝혀내지 못하면 대중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독재자', '살인마' 이승만이란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오로지 사실만이 진실로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걸 위해서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여러 나라들을 돌며 이승만 행적 찾기에 주목했다.

다행히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와 기록필름들이 발굴되었다.

괴벨스 말에 비유하자면, 친북 좌파 세력들의 '이승만 죽이기'를 반박할 수 있는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확보된 셈이다.

그런 수고스러운 작업이 없이는 거짓과 선전 선동과 맞설 수 없다는 각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10여 가지 넘는 이승만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객관적 증거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전문가들의 증언도 인터뷰를 통해 얻어낼 수 있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것 없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가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한 '386세대'의 통렬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하고 싶다.

솔직히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내가 대학에서 배운 이승만은 부정과 모순의 종합선물 세트와 같았다.

그걸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살아왔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도 한몫을 했다.

더 이상 거짓 이데올로기로 한평생 대한민국만을 생각했던 '이승만'이란 한 노인을 죽이는 일은 멈춰야 한다.

그것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진정한 바람이기도 하다.

영화의 극장 개봉을 준비하면서 다섯 차례나 비공개 기술 시사회를 했다.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검증을 받기 위함이었다.

몇일전 한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어느 중학생이 마이크를 잡더니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제가 이승만에 대해서 안 좋게 보고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학교에서도 교육을 그렇게 하고... 이승만에 대해서 ‘개만도 못한 ×××이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까요.

이승만이란 대통령이란 분께서 초대 대통령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여러 일을 하시고, 여기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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